클레오파트라 7세. 그녀는 흔히 ‘이집트의 여왕’, 혹은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의 모국어는 이집트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고대 그리스어의 일종인 코이네 그리스어를 썼고,
심지어 그녀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유일하게 이집트어를 배운 통치자였다고 전해집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의문이 생깁니다.
이집트를 다스린 여왕이 왜 그리스어를 말했을까?
그녀는 진짜 이집트인이었을까, 아니면 외래 통치자였을까?
이번 글에서는 클레오파트라의 언어와 혈통, 정체성을 중심으로
그녀가 이집트를 어떻게 이해했고, 어떻게 자신을 ‘이집트 여왕’으로 자리매김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를 다스린 그리스인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입니다.
그런데 이 왕조 자체가 이집트 토착 왕조가 아니라,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서 시작된
그리스계 헬레니즘 왕조였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알렉산드리아를 건설
이후 그의 부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를 물려받아 왕조를 세움
이 왕조는 약 300년간 이집트를 다스렸지만, 그리스 문화와 언어를 그대로 유지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자신들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근친혼을 장려했고,
관리와 학문, 종교도 그리스적 방식으로 운영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정치에서 배제되었고, 고위 관리는 대부분 그리스계 혹은 마케도니아계였습니다.
따라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여왕’이긴 했지만,
그 출발은 명백히 그리스 세계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왜 이집트어를 배웠을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자들은 대부분 이집트어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달랐습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녀는 당대 여러 언어에 능통했고,
특히 이집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던 유일한 왕조 통치자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당시 이집트 인구의 절대 다수는 이집트어만 사용하는 민중이었고,
이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은 정치적 상징성과 통치 정당성을 높여주는 수단이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단순히 언어를 배운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신들과 종교를 이해하고, 전통 의식을 존중하는 통치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녀는 종종 이시스 여신의 현신처럼 묘사되었고,
신전 건축과 제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토착 여왕’처럼 행동했습니다.
이러한 행보는 클레오파트라가 그리스계 혈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이집트 민중과의 연결선 위에 세우려 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언어는 정체성인가, 전략인가?
그렇다면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을 진심으로 이집트인이라 여겼을까요?
아니면 그저 정치적인 생존 전략으로 이집트어를 익히고 토착 문화를 수용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학자들은 양쪽으로 의견이 나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클레오파트라는 언어와 문화가 권력의 도구가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외국(로마)의 권력자들과는 그리스어로 소통하며 정치적 연대를 맺고,
이집트 민중에게는 이집트 여왕으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주며 민심을 얻으려 했습니다.
즉, 그녀의 언어 사용은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정치적 정체성의 다층적 설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클레오파트라는 멀티링구얼 리더였고,
각 상황에 따라 정체성을 유연하게 구성하고 전달할 줄 아는 전략가였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바라본 클레오파트라의 정체성
오늘날 우리는 ‘정체성’을 하나의 고정된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복수의 문화와 정체성이 공존하는 상태로 이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클레오파트라는 고대 세계에서도 드물게
다문화, 다언어, 다정체성을 체화한 인물입니다.
혈통으로는 그리스계 마케도니아인,
언어로는 코이네 그리스어 사용자이자 이집트어 화자,
정치적으로는 로마와 협력한 외교가이자 이집트의 전통을 수호한 여왕.
이 복합적인 정체성은 그녀가 단순한 왕족 이상의 존재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녀가 이처럼 다층적인 정체성을 능동적으로 관리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통치자 중 한 명으로 남아 있는 것이죠.
클레오파트라는 단순한 ‘이집트 여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출신을 감추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무기로 바꿨습니다.
이집트 민중에게는 그들의 여신처럼,
로마의 정치인들에게는 동맹이자 연인이자 외교 파트너로,
그녀는 시대에 맞는 언어와 이미지를 선택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능동적으로 설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녀의 언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세상에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였던 셈이죠.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그녀를
이집트 여왕이면서도 그리스어를 말한 여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대를 앞선 정치적 전략가로 기억합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키워드
#클레오파트라 #코이네그리스어 #이집트여왕 #언어와정체성 #헬레니즘 #프톨레마이오스왕조 #다문화리더십 #정치전략 #여성리더 #고대사